일본 동경보다 3년 빨리 개통한 서울의 전차
일본 불량배들에 의해 을미사변(1895년)이 일어나 명성황후 민씨가 시해되자, 고종황제는 명성황후 민씨를 현재 청량리 홍릉수목원에 안치하고 홍릉을 자주 찾았다. 그런데 고종황제가 한번 홍릉에 거둥할 때마다 당시 돈으로 10여만 원 정도가 들었다.
이 당시 서울 서소문 안에는 서울과 인천 간을 운행할 철도 부설허가를 얻으려는 미국인 두 사람이 묵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은 콜브란과 보스트 위크로서 고종의 홍릉 거동행차를 본 뒤 고종황제를 배알한 뒤
"폐하, 외국에는 지금 전기로 사람을 태우고 다니는 차가 있는데 매우 빠르고 편리하며 기분이 상쾌합니다. 폐하께서 홍릉에 거둥하실 때에 이 차를 이용하시면 어떻겠습니까?"
라고 건의하고, 전기와 전차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자 고종황제는 큰 관심을 보이면서 "그렇다면 당신들이 설치할 수 있겠오?" 하고 하문했다. 이에 두 사람이 자신감을 보이자 고종황제는 두 나라의 공동출자로 전차부설공사를 하도록 허락했다.
이에 따라 정부는 75만원을 두 번에 걸쳐 지불하는 전등, 전차, 전화가설의 계약을 체결함으로써 1898년 10월부터 공사를 시작했다. 전차 노선은 청량리에서 동대문, 종로를 거쳐 서대문을 지나 현재 적십자병원 앞까지 단선(單線)으로 놓는 것이었다.
이 공사는 한국정부에서 적극 지원했다. 이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어 7개월 만인 1899년 5월 17일에 완공되어 귀빈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한 개통식을 거행했다. 개통식 때는 군인 300 명과 순검 250 명이 배치되어 행인들의 접근을 막았다. 마침 이날은 음력 4월 초파일이어서 거리로 놀러 나온 사람들이 많았다. 시민들은 괴물 같은 전차가 달리자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으나 이내 전차를 구경하려고 몰려들어 인파 때문에 전차가 여러 번 멈춰야 했다. 개통 당시의 전차는 40명이 탈 수 있는 일반용 8대와 귀빈차 1대가 운행했다.
전차가 개통되자 이를 타보려는 사람들이 줄을 지어 한번 타기가 쉽지 않았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1원을 갖고 승차하여 구간마다 요금을 지불해 가면서 하루 종일 타고 다니는 사람도 있었고, 강원도 어느 광산에서 집단으로 서울의 박람회 구경을 온 광부들은 전차를 타고 전 노선을 5번씩 왕복했다고 알려져 있다.
개통 직후에 8 대의 전차는 하루에 3만 명의 승객을 태웠다. 당시 전차 운전사는 모두 일본에서 데리고 왔지만 차장들은 한국인이었다. 전차 노선은 단선(單線)이었기 때문에 군데군데 대피소가 있어서 오가는 전차는 1 대가 비켜서야 지나갈 수 있었다. 전차 정류장은 없어서 오늘날 택시처럼 승객이 아무데서 손을 들면 전차가 서고, 자기가 내리고 싶은 곳에서 내릴 수가 있었다.
차표는 초창기에 없었으므로 현금을 내고 타야만 했다. 전차요금은 지금의 적십자병원에서 청량리까지 상등칸은 7전 5푼, 하등칸은 5전이었다. 이 당시 상등칸의 요금은 거의 쌀 1 되 값과 맞먹었으므로 비싼 편이었다.
원래 전차 부설은 고종황제의 홍릉 거둥에 사용하려고 했던 것인데 막상 전차가 개통되자 고종황제는 이용하지를 않으려고 하였다. 그 이유는 전차의 외모가 마치 상여(喪輿)를 닮았으므로 이를 불길하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개화기의 종로 사진을 보면, 종로 2가 쪽의 현재 YMCA가 있는 근처의 현대적인 건물이 보이는데 이 건물운 서울의 도시개조 사업을 주관한 한성전기회사이다. 이 회사는 고종황제가 20만원을 내고 미국 콜브란 - 보스트위크 회사가 기술을 제공하여 세워졌는데 사장은 서울시장인 한성판윤 이채연이 겸임했다.
또한 현재 세종로 네거리에는 고종황제 즉위 40주년 기념비전이 세워져 있는데 1899년 5월 17일 이곳에서 전차 개통식을 촬영한 사진이 남아있다. 그리고 동대문 근처에 화력발전소가 세워진 사진이 있는데, 여기에는 당시 가장 성능이 좋은 독일제 발전기가 시설되어 있었다. 이 날 개통식을 보러 흰 두루마기 입고 갓 쓴 사람들이 동대문(흥인지문) 성벽 위에까지 올라가 내려다보고 있는 사진도 남아있다.
서울의 전차는 일본 동경에 전차가 달린 것보다 3년 빨랐다. 일본에서는 요코하마, 교토에 이보다 조금 앞서 전차가 달렸지만 동경은 서울보다 늦었다.
러일 전쟁이 1904년 2월 8일에 일어났고, 바로 일본군인들이 서울로 들어온다. 미국『블랙 엔드 화이트』사진 잡지의 2월 13일자 표지 그림에는 진주한 일본 군인들이 서울 거리를 달리는 전차를 보고 신기해서 한국인 승객들을 강제로 내리게 하고 자기들이 타보는 그림을 게재하였다. 전차를 처음 보는 군인들이 대부분이었다. 러일 전쟁이 날 시점에 이랬는데도 우리는 모르고 지냈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신문명의 도입으로 전차는 일본사람들이 부설한 것으로 잘못 알고 있다.
서대문 바깥에 있었던 경성 철도 정거장을 찍은 사진을 보면 종로와 남대문로를 달리던 전차는 서대문 밖에 있었던 경성 철도 정거장에서 철도에 연결되어 전국으로 나갈 수 있다는 개념으로 대한제국 때 서울의 도시가 설계된 것을 알 수 있다. 이 당시 서울 도시개조사업은 서울만의 것이 아니라 전국 국토 개발의 시발로서 황성 개조사업이었다.
1901년에 서울을 다녀간 독일 쾰른시 일간지 기자 겐테(Genthe)가 서울에 관한 여행기 앞머리에 「한국의 도시와 생활」이라는 제목으로 자신이 본 서울에 관한 글이 실려 있다.
「동아시아의 모든 수도 중에서 한국 황제가 있다는 서울이 가장 주목할 만한 곳으로, 서울이 주는 첫 인상은 무척 특이하다. ……한편으로 ……동방 군주국 수도로서 동화 속에나 있는 그런 환상적인 호화찬란한 왕궁들을 찾아 볼 수 없으며, 또 다른 면에서는 토속적인 문화의 전통에 매달려 살면서도 새 시대의 발명품에 흥미를 갖고 새로운 것을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퇴보적이고 야만성을 보이는 아시아적 원시상태와 서양의 진보적 문명이 동시에 병행하고 있는 현상, …… 혼동 속에서 각기 나름대로 위치를 잡고 버티면서 제 갈 길을 걷고 있는 것이 참으로 놀랍고 기이한 현상인데, 이런 사회현상은 세계 어느 나라를 돌아봐도 두 번 다시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조선 황제와 개혁파는 어떻게 보면 운이 좋은 편이다. 사실 한국 사람들의 본성은 배타적이 아니다. 항상 타협적이며 순하고 친절하고 배우기를 좋아하는 부지런한 민족이다. 재치 있는 지도자들만 있다면 빠른 시일에 현대 문명국가의 수준에 오를 희망이 있는 국민이다. …… 중국에서는 아직도 전래적인 운수방법인 인력거를 타고 관광을 해야 하는데, 아직도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줄로 알았던 ‘고요한 아침의 나라’ 국민은 서구 신발명품을 거침없이 받아들여 서울시내의 초가집 사이를 누비며 바람을 쫒는 속도로 달리는 전차를 타고 여기저기를 구경할 수 있다니 어찌 놀랍지 않으랴!」
* 참고자료 : 박경룡, 『서울을 알고, 역사를 알고』, (2003, 수서원)
이태진,『고종시대의 재조명』(태학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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