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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병원, 광혜원(廣惠院)

에덴촌 2022. 4. 23. 08:52

헌법재판소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병원, 광혜원(廣惠院)

 

종로구 재동의 창덕여자고등학교 기숙사가 있었던 자리(현재 헌법재판소)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근대병원인 왕립(王立) 광혜원(廣惠院)이 있었다.

광혜원은 지금부터 103년 전인 1885 4 10일 조정에서는 종래 까지 전염병 환자를 치료하던 동서 활인원(西活人院)과 약을 지급하던 혜민국(惠民局)을 폐쇄함에 따라 이 업무를 맡게 되었다.

 

이 광혜원이 설립된 것은 1884년 갑신정변 때 개화파에게 자상(刺傷)을 입은 민씨 일파의 거물인 민영익(閔泳翊)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은 바가 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민영익은 칼에 맞아 중상을 입어 사경(死境)을 헤맬 때 우리나라에 머물던 미국의 북장로회 파견 선교의사(宣敎醫師) 알렌(安連)박사의 치료를 받아 완쾌되었다.

그러자 알렌박사는 서양의술을 완전히 신봉하게 된 민영익대감을 앞세워 광혜원 설치를 고종에게 적극 건의했다.

이에 따라 알렌박사는 광혜원의 원장을 맡게 되어 본격적인 서양식 의료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 당시 장안에서는

"가회방(嘉會坊) 잿골(齋洞)에 광혜원이란 서양 병원이 생겼다는데?"

"으음, 노랑머리에 파란 눈의 서양사람이 두 귀에 고무줄을 꽂고 가슴을 대보면서 주사를 놓아 병을 잘 고친다는 소문을 들었어. 그런데 칼로 상처를 마구 째고 약을 바른다는데 아파도 어디 겁이 나서 가겠나?"

라는 이야기가 오고 갔다.

 

한편 고종은 2주일 뒤에 백성들의 치료에 공이 크다고 하여 광혜원을 제중원(濟衆院)으로 고치고 이 병원은 통리교섭아문(統理交涉衙門)  안에 두도록 했다.

 

그러나 2년이 지나 국가재정의 궁핍으로 지원이 줄어들자 운영난에 빠졌다. 설상가상으로 1894년 갑오개혁에 의해 제중원의 관제를 폐지하게 되었으므로 미국 북장로회의 후원으로 운영해 나갔다. 제중원은 광무 8(1904) 9월에 남대문 밖 용산구 도동(挑洞)에 병원을 세워 세브란스라고 이름을 고쳤다.

 

재중원에서는 황해도, 평안도에서 13세부터 16세까지의 총명한 기생 2, 3명을 뽑아 병설(倂設) 여의원(女醫院)에서 의술을 익히게 했다.

광혜원이 세워졌던 종로구 재동은 대대로 풍양조씨가 살았다. 즉 조선중기 영조 때 9번 판서를 지낸 조상경 이래 조동면에 이르기까지 7년간 이조판서가 배출되었다. 물론 조대비(趙大妃)도 이곳에서 거처했다.

 

그 후 이 집에는 고종 때 우의정을 지낸 박규수(朴珪壽)가 살았다. 박규수는 실학자 박지원의 손자로서 개화사상의 선구자이다. 박규수는 1866년 평안도관찰사로 재임 때 미국 상선 제너럴 셔어먼호가 대동강에 들어와 행패를 부릴 때 관민을 동원에 불태워 버린 일도 있다.

그러나 박규수는 그의 사랑방에서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김윤식, 서재필, 유길준, 박영교 등 젊은이에게 평등사상과 근대 개화사상을 가르쳤다. 이리하여 헌법재판소(전 창덕여자고등학교) 자리를 ?개화사상 발생지로 일컫고 있다. 박규수 정승이 살던 중사랑(中舍廊) 뜰에 있던 600년 된 백송(白松)은 지금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박규수집은 우정국을 창설했던 홍영식 참판이 살았으나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피살되어 이 집마저 국가재산으로 환수되었다. 따라서 이 집은 광혜원으로 일시 쓰이다가 옮겨감으로써 조선말부터 일제 때까지 민중계몽에 앞장섰던 월남 이상재(李商在)선생이 살기도 했다.(*)

    

 

 

 재동 백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