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작품의 배경이 된 청계천
청계천변의 아름다운 풍경을 소재로 하거나 이 지역의 빈곤과 생활상이 문학작품의 글감이 되었다. 청계천변 수중박골(중구 다동, 현재 관광공사 부근)에서 태어나 자란 소설가 박태원(朴泰遠)은 1930년대 한국 소설을 대표하는 『천변풍경』(1938년) 『소설가, 구보씨의 1일』등을 썼다. 그는 당시의 청계천변의 건물이나 상점, 주민들의 생업, 세시 풍속, 서민들의 언어 등을 세밀하게 표현하였다.
『천변풍경』에서 「청계천 빨래터」의 일부분을 인용하면,
“아아니, 그럼 이거 참 빨래 공짜루 하는 줄 알었습디까?”
(……)위에서 무새빨래를 하였다고 아까 타박을 받은, 그 낯설은 여편네가 이편으로 내려와서, 하던 빨래를 대강 마치고서, 개천 둑에다가 널판 쪽으로 비스듬히 짜놓은 사다리를 반이나 올라가고 있는 것을 마침 빨랫줄을 매고 있던 샘터 주인이 발견하고 소리를 지른 것이다. 스물 너댓이나 그밖에는 더 안 되어 보이는 그 여인은, 잠깐 어리둥절하여 빨래터 주인의 얼굴만 바라보다가,
“그러믄, 돈을 내요?”
어이없이 묻는 양이, 이곳 풍습에는 매우 어둔 듯 싶다. 김첨지는 그대로 그곳에 가 서서 줄을 매면서도 더욱 기가 나서,
“아아니, 돈을 내요라니…그럼 이건, 누가 남 자선사업으루 허는 줄 알었습디까? 무어 이래저래 둔 드는 거, 노력 드는 거, 다아 그만 두구래두, 우선 해마다 경성부청에다 갖다 바치는 세금만 해두 수십 환야. 이건, 왜 어림두 없이 이러는 거요?”
하도 으르딱딱거리는 통에, 다시 얼굴이 새빨개가지고,
“그런 줄 누가 알었나요? 몰랐죠. 모르구 그랬죠”
(……)그렇다 알자, 빨래꾼들의 동정은, 역시, 그 아낙네에게로 몰려, 우선 점룡이 어머니가
“저런…그 시굴서 첨 올라 몰르구 그랬군 그래. 뭐어. 빨래두 많진 않은가 분데, 그저 이번은 그냥 눌러 봐 주구료.”
한마디 말하여 준 것을 기회로, 다른 여편네들도 각기 말들이 있어, 아무리 셈속 빠른 주인으로서도 그것에는 역시 별 수 가 없든지,
“여러분이 말씀두 기시고 하니, 오늘은 어서 그냥 가슈. 요댐버텀이나 정신 채리구…”
그리고 그는 큰 기침을 한 번 하고, 아주 그 김에 보기 좋게 개천물에다 가래침을 탁 뱉았다.
이 소설을 보면 1930년대에는 청계천에 사설 빨래터, 세탁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24년의 신문기사를 보면 경성부에서 청계천에 공설 빨래터를 설치할 계획을 수립하였다는 보도가 있으므로 일제 때 청계천의 빨래터는 공설과 사설이 있었고, 사설 빨래터는 하루 10전씩 받았던 것으로 나타난다.(*)
복원된 청계천 빨래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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