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요 14:10)
믿음의 본질이란
하나님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는 것입니다.
에고의 상상처럼
"하늘 보좌 높은 곳에 앉아
자기를 믿는 자만구원해주고
자신을 믿지 않는 자는 지옥에 보내며
자기에게 십일조하며 입장료를 내면서
아부하는 자에게만 축복을 주시는
속좁은 독재자를 추앙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우주의 법신은, 비유를 들면
사람이 개미 80억 마리를 만들어놓고
개미들의 하소연. 불편함, 불평.
희망사항, 간구를 일일이 들어주고
있을 만큼 어리석거나 한가하지 않습니다.
사람 개개인 속에 하나님의 속성이(=참나)
내재(탑재)된 걸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참된 믿음의 정수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나의 욕망이나 소망을
이루어주시는 도구나 심부름꾼이나
종이 아님을 분명히 아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내 안의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항상 살피고, 느끼며, 직관하는 것이
참된 믿음이요, 참된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성령이 내 안에 계시고
나와 함께 하시며
나의 영원한 본질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 성령, 그리스도,
부처, 불성이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본성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깨닫고 성령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밖에 있는 부처나
밖에 있는 하나님과
나와 별개로 존재하는 구세주란
그저 인간 에고가 만들어 낸 그럴듯한 신,
그저 맹신하듯 믿고 빌면 되는 손 쉬운 신,
믿기만 하면 구원해주는 망상으로 만든
우상일 뿐임을 확실하게 아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그들이 섬기고 바칠
절대권력을 가진 왕을 달라고 했던
이스라엘 민족들의 애걸복걸과 똑같이,
인간 에고에게는 절대권력을 가진 신,
숭배하고 찬양할 파라오같은
독재자 신을 간절히 원했던 까닭입니다.
에고에게는 무조건 믿고 투신할 수 있는
무소불위의 신이 꼭 필요한 까닭입니다.
에고에게는 그의 불안과 두려움을
없애줄 믿음, 덮어놓고 "믿기만 하면
구원"이라는 마법의 알약이 시급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본질이
에고에서 나와서는 안됩니다.
육신적 자아인 에고에게는
믿을만한 그 어떤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종교생활로 에고를 꾸미고 치장하며
감투나 직분으로 치렁치렁 과시하는 것은
자기 인생을 낭비하는 것이자
악귀에게 속고 사람에게 이용당하는 것이며
성령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예수께 저주받았던
독실한 종교인들이었던 바리새인들이
목숨을 걸고, 중요시하며 집착했던 것들이며
이것들은 그만한 실속이나 가치가 없고
심지어 해롭기까지 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인 자신의 중심,
그 깊은 심연속으로 잠잠히 침잠하는 것이
외부로 떠들썩하기만 한 종교생활보다
백배 나은 참된 종교생활이며
양심과 직관을 따라, 성령(참나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편이 훨씬 지혜롭고 보배롭습니다.
ㅡ예수 그리스도의 향기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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