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의 근정전, 남대문시장, 청계천의 반차도 도자 벽화, 남산 봉수대, 『한양가』에서 노래한
19세기 서울의 모습 중 21세기 현재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것들이다.
그때 그 시간을 그대로 품고 있는 것도 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모습이 바뀐 것들도 있다.
한양가의 곡조를 따라 19세기의 흔적이 남아있는 서울을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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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서울의 구체적인 모습
조선시대 서울의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글은 그렇게 많지 않은데,
특히 한글로 된 자료는 아주 드물다. 그런데 『한양가』라는 노래가 남아 있어서 19세기
한양의 여러 가지 면모를 볼 수 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한양가는 1880년에 간행된 장편 가사로 누가 지은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19세기 한양의 모습을 잘 그려놓았다. 서울의 과거를 알고 싶다면, 한양가를 한번 읽어볼 것을 권한다.
한양가의 내용은 첫머리와 결말 부분을 제외하면, 궁궐과 관청, 시장, 놀이터와 놀이,
왕의 수원 행차, 과거시험 등의 다섯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이들 다섯 가지 가운데 원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은 궁궐 정도이고,
그 나머지는 대부분 원형이 남아 있는 것이 없다. 광화문 앞에 관청이 늘어서 있던 육조거리나
놀이터로 유명했던 북일영北一營 같은 곳은 말할 것도 없고,
임금이 한강을 건너기 위해 설치한 배다리와 관련된 시설 등도 이제는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없다.
또한 과거시험은 그 제도가 없어진 지 이미 오래되었고,
시장도 19세기의 모습이 남아 있는 곳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렇게 완전히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것도 어딘가에는 그 흔적을 남기고 있으므로,
한양가에서 노래한 19세기 한양의 모습 가운데 현재 남아 있는 자취를 찾아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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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백성을 다스리고 거처하던 곳, 경복궁과 창덕궁
한양가에서 궁궐을 묘사한 내용을 보면, “인정전과 근정전은 백성을 다스리는 곳이고,
희정당과 대조전은 임금님과 왕비께서 거처하는 곳이다”라는 대목이 있다.
인정전과 근정전은 각각 창덕궁과 경복궁에 있는 건물로 임금이 신하들과 조회를 하던 정전正殿이다.
그리고 창덕궁의 희정당은 왕이 평상시에 거처하는 곳이고, 대조전은 왕비가 지내는 건물이다.
경복궁은 임진왜란으로 전체가 불에 타서 폐허가 되었으나 고종 때 다시 지어 1867년 완공했는데,
근정전은 이때 다시 지은 것이다. 20세기 들어 일제는 경복궁의 많은 건물을 허물고
그 자리에 총독부 건물을 지었지만, 근정전은 허물지 못했다.
20세기 말에 정부는 경복궁 복원 사업을 시작하면서, 먼저 총독부 건물을 없애고,
계속 옛 건물을 복원하여 경복궁의 원형을 다시 만들어가고 있다.
창덕궁의 인정전은 1803년 12월에 화재로 불탔는데, 그 다음 해 12월에 다시 지었다.
그리고 희정당과 대조전은 1917년 화재로 소실되었는데,
경복궁에서 헐어낸 궁궐의 목재를 이용해서 다시 지었다.
이처럼 창덕궁은 20세기에 들어와 새로 지은 건물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조선시대 궁궐의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
현재 창덕궁은 조선시대 궁궐 가운데 유일하게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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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 삶의 터전, 남대문시장
서울은 조선의 중심으로 온갖 물건이 모이는 곳이므로, 서울의 시장에는 없는 것이 없었다.
한양의 남대문에서 보신각을 거쳐 동대문까지는 모두 가게가 있었는데,
대체로 같은 품목을 파는 가게들이 모여 있었다. 한양가에서 묘사한 시장을 보면,
남대문 근처의 과일 가게와 생선 가게, 을지로 입구의 약방, 청계천의 광통교 근처 그림 가게,
보신각 부근의 장신구 가게 등이 있고, 종로에는 비단, 무명, 종이, 삼베, 해산물 등을 파는 상점이 있었다.
현재도 남대문에서 동대문까지의 큰길은 상업의 요지인데,
한양가에서 언급한 시장 가운데 현재까지 그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남대문시장이라고 할 수 있다.
한양가에서는 “남대문 안 큰 과일 가게에는 각색 실과가 다 있구나”라고 했는데,
이 과일 시장에는 감, 배, 대추, 밤, 잣, 호두, 포도, 복숭아 등 국내산 과일은 물론이고,
용안이나 여지 같이 중국에서 들여온 과일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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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다리를 건너 정조를 향해, 수원 능행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수원에 모시고, 이곳에 여러 차례 행차를 했다.
그리고 자신의 묘지도 아버지 묘 근처에 썼다. 후대의 여러 왕은 정조의 묘를 참배하기 위해 수원에 갔는데,
이를 능행陵幸이라고 한다. 능행에서 가장 장관이었던 것은 왕이 한강을 건너는 일이었다.
왕은 배를 타고 강을 건너지 않기 때문에, 왕이 한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임시로 다리를 설치해야 했다.
많은 배를 일렬로 엮고, 그 위에 널빤지를 깔아서 만드는 이 다리를 ‘배다리’라고 한다.
임금의 행렬은 그 자체가 구경거리였는데, 특히 이 행렬이 배다리를 지날 때는
한강의 양쪽 강변에 구경꾼이 가득했다. 한양가에서 배다리를 묘사한 대목을 보면,
“배 위에 두꺼운 소나무 깔고, 그 위에 얇은 소나무를 깐 다음, 그 위에 모래를 펴고,
모래 위에 가는 모래를 펴고, 그 위에 황토를 깐다. 그리고 좌우에 난간을 만들고,
팔뚝 같은 쇠사슬로 뱃머리를 걸어 맨다. 양 끝과 한가운데에 홍살문을 세운다”라고 했다.
근래에 이 능행을 재현하는 행사를 열면서, 배다리도 설치해서 한강을 건너고 있다.
또 청계천에는 전체 길이가 200m에 가까운 반차도 도자 벽화가 있어서,
한양가에서 노래한 임금의 수원 행차를 그림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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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을 전하는 곳, 남산 봉수대와 보신각종
19세기 말 서울을 방문한 외국인의 기록을 보면,
서울의 명물 가운데 하나로 남산의 봉화와 보신각의 종소리를 꼽았다.
한양가에도 “길마재 한 봉화에 남산 봉화 응하여서 일제히 네 자루가 변방이 무사함을 보고한다”고 했고,
“초경 삼점 인정 소리 이십팔수 응하였고”라고 했다. 매일 저녁 해 질 무렵
남산에는 네 개의 봉화가 약 15분 정도 타올랐는데, 이것은 전국이 평안하다는 신호였다.
그리고 해가 진 뒤 한 시간 반쯤 지나면 보신각종을 28번 울렸는데,
이때부터 통행금지가 시작되었다. 현재 남산에 봉수대를 복원한 것이 있는데,
정확한 위치와 원래의 모양을 제대로 알 수 없어서 수원의 화성에 있는 봉수대 모양을 본떠서
만들었다고 한다. 보신각종은 원래 1468년에 제작된 사찰의 종이다.
임진왜란 이후 이 종은 종로로 옮겨서 통행금지와 해제를 알리는 용도로 사용되다가
광복 후에는 ‘제야의 종’을 칠 때 울렸다. 그러나 손상이 심해져서
새로 만든 종을 보신각에 걸어놓았고, 원래 종은 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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