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이름 I am that i am새창으로 읽기
우리 모두는 다 불완전하고 부족하다.
누구에게나 잘 하는 일이 있고 뛰어난 면이 있다.
누구에게나 장점도 있지만 단점이 있으며
이 기본적인 사실에는 우리 자신도, 교황도
그 누구도 예외가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이 기본을 망각할 때 사람을 추종하게 된다.
누구에게나 좋은 점과 안좋은 면이 함께
공존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한다면
우리는 인간에 대한 기대치를 낮추게 된다.
신부나 목사,삯꾼과 교주에 대한 기대나
인간에 대한 기대치는 낮추면 낮출 수록,
신이 심어주신 건강한 판단력과
냉철한 분별력이 건강하게 작동하게 되고
삶의 질과 행복지수는 높아지게 된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누구에게 가스라이팅 당히고 있는지,
또 어떻게 가스라이팅 당하고 있는지조차
까맣게 자각하지 못한 채, 즉ㅡ
배워야 할 것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채
어둠과 고통, 혼돈속에서 자기 인생을 끝마친다.
그러면 멀리 해야할 나르시시트를
가장 가까이 가장 친밀하게 느끼게 되거나
경계하야 할 악인의 입김에 여지없이 휘둘린다.
나를 조종하고 억압하는=가스라이팅하는 사람.
주변에 꼭 한 두사람은 있는...
"이런 사람 근처에도 가지 마세요"
https://youtu.be/6M5-1falW3g?si=SItpUOGLO_4PAxal
"가족도 예외가 없습니다."
https://youtu.be/O3uPW95QJvs?si=YvJRfuUb78th-zVF
나르(악인)는 수치심은 느끼지만,
자기 반성이나 죄책감은 못느낀다
부모, 남편, 아내, 자식에 대한
기대치를 낮추고 기대를 내려놓는다면
우리 마음에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
오히려 감사한 일이 넘쳐나게 될 것이다.
"기대도 안했는데 도와주다니 고맙다" 부터...
"밥을 해주니 고맙다. 생활비를 주니 고맙다."
등등...사소하고 일상적인 일,
하나 하나 마다 감사한 마음이 들게 것이다.
실망하거나 분노할 일도 줄어들거나 없어진다.
그러니 반대로 잔뜩 기대치를 올려두고 있다면
"아니 그것도 못해? 그건 당연한 거 아냐?"식의
불평과 불만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날 것이다.
불평과 불만은 곧바로 불행과 괴로움이 된다.
고로 나 자신에 대한 기대치나 남에 대한 기대치,
인간에 대한 기대치는 내려놓으면 내려놓을 수록
인간관계가 훨씬 편해지고 부드러워진다.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대폭 줄어든다.
타인에 대한 기대치를 낮출수록 우리는
더 행복해지고 자유로워지게 된다.
자연스레 마음의 여유와 휴식이 찾아오고
정신적, 정서적 긴장이 풀리게 된다. 그러면
관계에 대한 바르고 냉철한 판단도 용이해지고
매사에 집중력와 창의성, 효율성이 더 높아진다.
사람은 모든 사람들에게 다 좋은 사람이 될 수 없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또 그럴 필요도 없다.
아무 이유도 없이, 날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이유없이 날 싫어하는 사람도 항상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인생을 살기도 바빠서
남의(내) 일에 별 관심이 없다.
누가 마약을 하건, 불륜을 저질렀건, 자살하건
그저 한때 지나가는 가십꺼리 정도로 여긴다.
고로 남의 눈을 지나치게 의식할 필요가 없다.
남의 태도나 반응에 뒤흔들릴 이유가 없다.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이고 자신의 마음이다.
자녀에 대한 기대치가 과할 경우
독재자나 폭군같은, 악한 부모가 되기 쉽다.
자녀를 강하게 지배하고 통제하려 하기 때문에
자녀는 자연스레 위축되게 된다. 눈치를 살피게
되고, 수동적이게 되므로 창의성이 말살되어 가며
강압과 통제에 눌려 답답하고 불안한 심리가 된다
또, 폭군 부모의 개대와 요구에 못 미치는자신을
수시로 자책하게 되고, 한편으로는 늘 변명하게 되는
불행하며 자존감 낮은 존재로 굳어지기 때문이다.
자녀가 성인이 되거나결혼하여 독립했음에도
집착하거나 간섭하면서 좌지우지하는 부모도 있다
또, 부모의 지나친 자녀 사랑과 내정간섭은
자녀의 정서적 독립과 경제적 자립을 가로막는
방해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
교주나 삯꾼은 늘 항상, 수시로 가스라이팅한다.
가스라이팅 하는 것이 그들의 직업인 까닭이다.
특히나 말하기를 좋아하는 말쟁이가 삯꾼이 되면
입으로 자신의 온갖 스트레스를 다 풀면서
신도들을 등쳐먹고 좌지우지 이용하면서 살게 된다.
"I AM 신뢰예요," 했던 사기꾼의 좌우명으로
자신에 대한 신뢰와 기대치를 끌어올리는 데
최선을 다하는 비류들이다.
그래야 신도의 호감을 얻고, 헌금과 돈이 생기며
추종자와 지지자들이 생겨나 성공이 보장되기
때문에 탱자 탱자~먹고 놀며, 병신도들에게
대접받아 가며 유람을 즐기며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친절한 미소, 화려한 미사여구, 위장된 겸손은
사기꾼과 위선자들의 기본 3종 세트다.
그러기에 겉모습으로만 보면
정말 선하고 좋은 사람들이다.언제나
말은 청산유수요 그럴듯 한데, 정작 그들이
하는 행동(짓)은 항상 남들 위에 군림하는 짓, 남을
등쳐먹는 일, 최대한 지인을 이용해 먹는 짓 뿐이다.
곰곰히 생각해본다면, 그들 행위의 열매를 볼 수 있다.
우리는 열매를 보아 그 나무를 분별해야지
잎사귀(말)만 무성한 그 실체에 속지 않게 않게 된다.
연예인들이 자기 몸값을 높이기 위해
외모관리에 목숨을 걸듯 교주나 삯꾼과
사기꾼들은 좋은 사람으로 보이는 것에
목숨을 건다. 그래서 철저한 위선자가 된다.
그렇게 자신도 모르게 내면화된 위선의 습관은
따르는 신도들까지 서서히 위선자로 만들어 버린다.
그런데 만약 교주나 삯꾼에 대한 기대치를
모두 내려놓는다면 어떻게 될까?
결과는 놀라울 정도로 영적 시야가 명료해진다.
종교적, 교리적으로 -가스라이팅 당할 일도
없어질 것이고 함께 불법을 행하거나 불법에
동참하는, 선악을 거꾸로 볼 가능성도 적어진다.
그럴 때 비로소 그 사람은
삯꾼의 눈치나 살피는 비루한 종교노예에서
해방되게 된다. 삯꾼이나 교주나 나나
신앞에서 동일 선상에 있는 한 인간으로서
스스로 성전된 자신의 주권을 찾게 되며
신이 주신 나만의 자유의지를 되찾아
진정한 영적인 자유가 무엇인지 맛보게 된다.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 떠들어대는
"내가 신의 대리자다. 사자다. 종이다"
"나를 따르라. 하나님을 대신한 내게 바치라."는
는 인용 성구에 끌어다붙이는 그릴듯한 말속에
숨어있는 교활함, 사기성, 교만과 거만을 직시하게 된다.
그런 인간이 만든 조직과 단체에 푹 빠져
열광하는 자들은 삯꾼이나 교주,
그들간의 인간관계에 집착하는 특징이 있다.
우리 목사님, 권사님, 집사님, 성도님, 우리 자매님~
서로 인정해주고 칭찬함으로써
아주 긴밀하고 특별한 유대관계를 만드는데,
이 끈끈한 끈끈한 맛, 종교에 중독된 자들은 마치
파리 끈끈이에 붙은 파리같은 처지가 되어버린다.
마치 마약이나 알콜에 중독되듯 종교에 중독되어
자기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을 상실해 버린다.
세뇌와 부추김 설교와 선동이 강화됨으로써
마침내 종의 종, 맹신도, 병신도, 종교노예가 된다.
이들의 의식은 이성도 상식도 공의도 없는
짐승 상태가 되어, 오직 교주에게 열광하고 홀려
자기 안의 참된 하나님, 진짜 보물을 잃어버리게 된다.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믿게 함으로써
자신의 육체가 성전임을 망각하고 만다.
자기 내면에 양심과 진리의 빛이 흐르고 있건만
삯꾼에게 속아 건물과 사람이나 외부에서
진리를 찾으려고 마르다처럼 동분서주해진다.
무의미한 종교활동,=육체적인 종교활동=
=주일성수나 십일조같은= 삯꾼들의 배만
불리는 것들=겉겁떼기와 형식에 집착하는
목이 곧고 배타적인 바리새인들이 되어버린다.
하나님의 이름은 "나는 나다"
나는 스스로 있는자 (I AM THAT I AM , KJV)
하나님의 이름은 관계에 의해 규정된 이름이 아니다.
존재 그 자체로 규정된 이름이다.
그러므로 내가
존재 자체로 나를 규정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나는, 우리는 신과 가장 가깝게 있게 된다.
인간 관계속에서 나를 (누구다. 무엇이다라고)
규정하려는 모든 에고의 생각을 내려놓을 때만
비로소 나는 나의 참된 정체성을 찾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신의 한 조각들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신의 한 조각인 것을 아는 사람들이
참으로 거듭난 자들이요, 견성한자, 깨달은 자들이다.
이들은 장차 신의 궁전으로,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피조물에 종노릇 하는 자들=
종교 중독자들은 자신의 본질과 정체성을
알지 못하고 방황하며 유리하는 별들이 된다.
오롯이 빈 몸, 빈 마음으로,
내모습 그대로,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
나 자신에게 모든 초점을 맞출 수 있을 때,
나는 신과 1 대 1로 대면을 하게 된다.
내 존재 깊은 중심에서...나의 내면에, 생각과
감정에...마음에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똑바로 직시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신이 무엇인지, 누구인지 비로소 알게 된다.
내 안에 빛이 있고 진리의 영은 오직 내 안에 있음을...
내 안에 평화가 있고 외부에는 전쟁뿐임을...
내 안에만 완전함이 있고 외부는
늘 언제나 불완전함과 불안이 늘 넘쳐냐다는 것을...
내 안에만 영원한 평화와 기쁨이 있고, 마음이나
에고는 일시적으로만 그것을 느낀다는 것을...
그토록 애타게 찾아 헤매던 것이 정작
내 안에=성전안에 이미 다 있었다는
사실을 깨우치고 늘 확인하게 된다.
신 역시 내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처음부터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음을 알게된다.
깨우친 자들에게는
교황이나 교주나 삯꾼, 무당은 별 의미가 없다.
그러나 여전히 외부에서 신을 찾고
외부 시선의 눈치를 살피는 자,
외부 칭찬에 목 마른자.
타인과의 관계에 사활을 거는 자들에게는
교주 함정과 삯꾼 함정
종교중독을 벗어날 길이 요원해진다.
당신은 누군가?
나는 목사고 장로고 권사다가 아닌
당신은 누군가?
나는 누구 딸이고 누구 아내고 누구 엄마다가 아니고
직장인이고 무슨 일을 하고 어떤 명함을 가졌다가
아닌... "나는 나다."라고 말할 수 있는 당신을
찾았는가! 참나를 아는가? 성령을 아는가?
성령을 느끼며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은
인간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지 않는다.
인간관계나 직분으로 결코 자신을 정의하지 않는다.
남의 태도, 남들의 칭찬이나 비난, 말이나 생각이나
감정이나 그 중심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게 된다.
ㅡ예수 그리스도으 향기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