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준비된 자만
운명의 십자로 에서 마주칠 때마다
우(右)냐 좌(左)냐의 선택을 재촉 받는다.
즉 고난과 과감하게 맞서느냐
그렇지 않으면 회피하느냐의 선택을
재촉 받는 것인데 그 판단은
당신의 자유의사에 맡겨져 있다.
그 시점에 있어 주어진 환경에 의한 제약이 있고
여기에 반응하는 개성과 기질의 차이에 의해서도
달라질 것이다.
지상 생활이라는 순례(巡禮)의 여행에서
내재하는 신성을 개발하기 위한 기회는
이미 준비되어 있는 것이다.
그 기회를 앞에 두고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느냐
소극적 태도를 취하느냐,
멸사(滅私)의 자세로 나가느냐
이기주의로 달리느냐는
당신 자신의 판단에 의해 정해진다.
지상 생활은
그 선택의 연속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선택과 그 결과 즉 작용과 반작용이 인생을
수놓아 가는 것이고,
동시에 또 수명이 다하여
영계(靈界)에 왔을 때,
거기에서 기다리고 있는 새 생활,
새 일에 대한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는가 아닌가,
능력에 적당한가, 부적당한가,
영적으로는 성숙하고 있는가,
아닌가도 그것에 의해 결정된다.
단순한 것 같으면서도 실로 복잡하다.
능력이나 재능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책임도 커진다는 것이다.
지상에 재생할 때 각자는
지상에서 사용할 재능에 대해 이미 인식하고 있다.
재능이 있으면서 그것을 사용하지 않는 자는
재능에 없는 사람보다 큰 책임을 지게 된다.
당연한 일일 것이다.
슬픔은 혼에게 깨우침을 주는 수많은
체험 중에서도 특히 깊은 의미를 갖는 것이다.
슬픔이 혼의 깊은 곳에 닿을 때
가장 잘 진동 함으로써
혼의 눈을 뜨게 한다.
혼은 육체의 깊은 곳에 묻혀 있기 때문에
그것을 눈뜨게 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강렬한 체험을 필요로 한다.
슬픔, 원한(怨恨), 병고(病苦), 불행이 등은
지상에 인간에게 있어서
교훈을 배우기 위한 중요한 수단인 것이다.
만약 그 교훈을 간단히 배울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별 가치 없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슬픔의 극, 괴로움의 극에 있을 때라야
배울 수 있는 것이므로
그것을 배울 준비가 되어있는 영은
비로소 커다란 가치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여러 번 말했지만 진리는
■ 혼이 그것을 깨우칠 준비가 되었을 때
■ 비로소 배울 수 있다.
영적으로 받아들일 태세가 갖추어질 때까지는
절대로 진리의 눈뜰 수 없다.
아무리 원조의 손길을 주어도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자는
구제 받지 못한다.
참된 영적 지식을 이해하는 시기를
결정하는 것은 혼에 발달 정도에 있다.
(※더 높은 차원의 영적 지식도 마찬가지)
다시 말하면 혼의 진화 정도가 결정하는 것이다.
육체의 둘러싸인 당신들 인간이
물질적(物質的) 견지(見地)에서 우주를 바라보고
일상의 일들을 물적(物的) 척도(尺度)로 재고,
생각하고, 평가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으나
그것은 긴 이야기 속
한 날의 에피소드에 불과한 것이다.
영계(靈界)로부터의 메시지
Silver Birch실버 버치
제 4 장 괴로움과 슬픔 - 혼의 시련
작은 생명체의 웅장한 도전
https://youtube.com/shorts/cb5F6_nfuYw?si=JEW57VizsKPQW3Pa
사랑을 실천하고픈 댕댕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