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그가 물었다.
"너에게 기도란 무엇을 의미하지?"
“음, 나는 대체로 뭔가를 원하거나
문제를 가지고 있거나 아플 때 기도를 하곤 해요.
때로는 감사의 기도를 드릴 때도 있구요.”
그가 말했다.
" 그래. 기도할 때 너는
대개 불안정한 상태에 있지 않니?
아니면 모순에 처해 있거나
불행하거나 혼란된 상태에 있지 않니?"
“예, 행복하거나 만족을 느낄 때
기도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요.”
"그렇다면 말이야.
기도가 어떤 만족감을
가져다 주는 것이 틀림없어.
그렇지 않다면 사람들은
이미 오래 전에 기도를 포기했을 거야.
구하면 받게 돼.
믿음의 정도에 따라 받게 되지.
이것이 기도의 자연스러운 결과야.
그렇지 않은가?
예수께서 말씀하셨지.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받게 될 것이다.'
이것은 진리야.
하지만 기도할 때 너는
어떤 형태로든 만족을 추구하게 된다.
차원이 높건 낮건
만족을 구하고 있는 마음에게는
대개 맹목적인 믿음이라 할지라도
그 믿음의 정도에 따라
특정한 양의 만족이 있게 돼.
그러나 기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어.
기도의 매커니즘을 이해할 때
우리는 그것을 발견할 수 있어.
“자, 너는 기도할 때 어떻게 하니?
특정한 말들을 반복하거나,
특정한 자세를 취하거나 하지 않니?
그러면서 너는 응답을 구하고 있지.
응답에 대한 갈구 속에서
마음은 다소 고요해지게 되지.
그리고 그 고요한 상태에서
너는 만족감을 느끼게 돼.
그리고 고요한 상태 속에서만
마음은 응답을 받을 수 있지.
하지만 이것은
네 자신을 이해하는데는
도움이 되지 않아.
어떤 결과(응답)를
요구하고, 추구하고, 갈구하는,
이런 상태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야.
“기도 속에서 사람은
항상 ●손을 벌리고 있어.
기다리고 희망하면서...
그러나 그런 희망 속에는
절망감이 수반되지.
너는 어떤 상태에서 벗어나거나
어떤 것을 얻기를 갈망하고 있어.
그러나 기도는 결코 너로 하여금
●기도를 하게 만든
●그 상태로부터 마음을 해방시킬 수 없어.
따라서 항상 불안한 상태가 지속되지.
그리고 이 불안한 상태가
바로 마음으로 하여금 계속 기도하게 만들어.
그러므로 ●해결책은 마음을
그 자신의 문제들을 만들어내는 것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거야. 그렇지 않니?
기도는 기도하는 자가 하기 나름이야.
우리가 뭔가를 요구할 때
거기에는 무의식적인 응답이 있게 돼.
그 응답은 수세기에 걸친
무의식적 체험으로부터 오는 거야.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 상태에 따라 받게 돼.
예수께서 말했듯이. ‘받았다고 믿어라.
그러면 너는 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마음은 언제나
●대립 속에서 살고 있어.
소유와 빈곤, 건강과 질병,
성공과 실패, 선과 악 등,
●마음의 모든 과정을 이해했을 때만
너는 ●대립의 상태를 초월할 수 있어.
●이것이 기도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야.
대부분의 기도는, 기도하는 자에게
그 어떤 해결책도 가져다주지 않아.
간구에 대한 해결책도 아니야! 간혹
어쩌면, 너는 원하는 것을 얻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렇다 해도
●뭔가를 바라는 마음 자체-를
없애지는 못해.
따라서 중요한 것은 너의 기도에 대한
피상적인 응답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네가 해결되기를 바라는
●그 문제를 만들어내는 마음의
●모든 과정을 이해하는 거야.
“세상 사람들은 오랫동안
평화를 위해 기도해왔지만,
평화는 언제나 저 먼 곳에 있을 뿐이지.
●전쟁의 원인을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무슨 효과가 있지?
●성공을 위해 기도하는 것보다
실패의 원인을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질병의 원인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건강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효과가 있을까?
●기쁨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보다
슬픔의 원인을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너는 환희에 찰 때는 기도하지 않아.
어떤 문제가 있을 때만 기도하지.
●너는 네가 해결 할 수 없는
갈등이나 어려움을 겪을 때만 기도하지.
이런 기도의 메커니즘에는
●마음, 즉 에고가 바로 문제의 원인이야.
우리가 깨달아야 할 중요한 것은
마음의 모든 과정을 이해하는 거야.
그렇게 되면 마음은 더 이상
했던 기도 또 하고, 또 하는 식의
중언부언 기도하지 않게 되고
(중언부언 [重言復言]의 뜻
-이미 한 말을 자꾸 되풀이함
-자꾸 되풀이하다)
억지로 고요하게 만들 필요도 없게 되지.
이미 내가 설명했듯이, 마음은
올바른 명상을 통해서만 고요해지게 돼.
진리와 실재는 바로 그 고요 속에 있어.
실재(하나님= 신 =영)는
그 어떤 문제도 갖고 있지 않아.
문제를 만들어내는 것은 에고일 뿐이야.
그리고 자아가 그 문제에 대해 기도하지.
에고가 문제를 만들어내고
그 에고가 기도를 하는 거지.
해결책은 문제의 원인을 이해하는 거야.
●문제의 원인은 바로 너 자신 즉, 에고야.
●자아는 실재 속에는 존재하지 않아.
●자아의 본질을 이해했을 때 비로소
그것은 녹아 사라지게 돼.
●그와 함께 문제도 사라지게 되지.
그렇게 될 때만 실재가(신이)...
창조성이... 즉각 현존하게 돼.
그것이 진정한 기도고 그것이 존재야.
그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존재의 무한한 상태=>
효율성, 포괄성을 체험해야만 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종교인들,
기독교인들) 외부의 신을 믿고 있어.
●외부의 신을 믿는 이상 그들은 결코
●자기 자신도, ●신도 알지 못한단다.
자아가(교리나 조직이나 관념에)갇혀 있을 때,
갇힌 에고는 외부의 신에게 기도하게 되지.
이것이 바로
신자들이 결코 신을 알 수 없는 이유야.
그의 대답이 끝난 후...
나는 침묵 속에 있었다.
그것은 억지로 만들어진
침묵이 아니었다.
ㅡ그리스도 요가ㅡ중에서(펌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