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에게 주는 선물, 용서
용서는 언제나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다.
당신이 용서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주는 선물이 아니다.
이번 생과 다른 생의 과제는 똑같다.
이번 생에서 내가 마주한 "용서과제"를
이행할 때 상위자아는 그 용서의 빛을
당장에는 내가 인지하고 못하고 있을
다른 모든 생에도 비춰준다.
시련이란, 미처 배우지 못한 교훈들이
다시 한번 주어지는 것일 뿐,
그리하여 이제 난 이전에
그릇된 선택을 내렸던 자리에서
더 나은 선택을 내릴수 있고
이전의 선택이 가져다 준
모든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용서를 하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지든
그로 인해 느끼는
불편한 감정에서도 자유로워질 수 있다.
용서의 목적이 각본을 바꾸는것이 아니라
그 결과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지만
고정된 범위안에서 상위자아가, 나를 위해
시간과 공간을 조정하는 것도 가능하다.
내가 할 일은 오직 용서하는 것 뿐이다.
당신이 상대에게서 보는 것은
사실 당신이 자신에 대해 품고 있는
은밀한 믿음이다.
당신은 그 믿음에서 벗어나는 한 방법으로서
그것을 상대 안에서 보기를 선택한 것이다.
이것을 기억할 수 있다면
당신의 용서를 통해 풀려나는 것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용서하는 일에
불만을 품는 것은 에고밖에 없다.
(에고는 부글부글 충동질한다.
"용서하면 너는 지는 거야.
내가 왜 용서해야 하는데?
용서는 수치스러운 거야.
패배자가 되는 거라고!
넌 자존심도 없니?
통쾌하게 본때를 보여줘!")
인간은 육체적 현실을 꾸려나가는데만
정신이 팔려 있다보니,
인간의 육신이란
결국에는 똑같은 결말에 다다른다는
뻔한 사실을 보지 못하고
에고가 보여주는 싸구려 모조품 대신
영원한 것을 자기 삶의 기반으로 삼는게
현명하다는 걸 잊는다.
신과 영(spirit)은 동의어이다.
용서는 영의 영역, 신의 영역이다.
육신의 고통은 용서하지 못하는 것과
무의식적 죄책감 때문에 일어난다.
지옥은 신에게서 멀리 떨어진
거리로 그치지 않는다.
신에게서 분리되어 있는 것은
무엇이든 지옥이다.
분노는 절대 정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분노를 퍼붓는 대상은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불멸의 존재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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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누군가에게 벌을 주고 싶다는 감정
고통받게 해주고 싶다는 무의식적인 욕망을
스스로 알아차리는 일은
영적 성장에 꼭 필요한 중요한 요소입니다.
https://youtu.be/-89kbhfM2ls
"내가 품은 감정은
상대의 태도에도 반영된다
놓아버림, 데이비드 호킨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