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지로 입구의 고운담골[美洞]
고운담골[보은단동]
을지로 입구의 고운담골[美洞]
현재는 그 이름을 듣기 어렵게 되었지만 을지로 1가와 남대문로 1가에 걸쳐 ‘고운담골(美洞)’이란 동명이 있었다. 이와 같은 동명이 유래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온다.
조선 선조(宣祖) 때 홍순언(洪純彦) 통역관이 고운담골에 살았다. 그는 서얼(庶孼) 출신으로 높은 관직은 오를 수 없었으나 통역뿐만 아니라 문장도 뛰어났고 인품도 출중하였으며 남의 불행한 것을 보면 참지 못하는 의기의 남자였다고 각종 기록에 나타나 있다.
홍순언이 어느 해 명나라에 가는 사신을 따라 남경 역관(驛館)에 머물고 있었는데 지내기가 무료하여 거리 구경을 나섰다. 이곳저곳을 구경하다 밤이 되었는데 마침 홍등가(紅燈街)를 지나게 되었다. 홍순언의 눈에 기이하게 보인 것은 집집마다 등불을 내걸고 여인의 몸값을 써 붙여 놓은 것이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어느 집 대문에 써 붙인 여인의 몸값이 너무나 엄청난 가격이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호기심이 생긴 그는 마음을 크게 먹고 그 집안에 들어갔다.
조금 있으니까 주안상을 든 소복한 미녀가 들어와 절을 하고 고개를 드는데 홍순언은 저도 모르게,
“허!”
하고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들어온 처녀의 미모가 마치 하늘의 선녀 같고 고결한 인품이 공주와 다름없지 않은가.
“필시 무슨 곡절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홍순언은,
“보아하니 귀한 댁의 규수 같은데, 대체 어찌된 일이오?”
하고 묻자 처녀는 입을 열지 않다가 마지못해 입을 열고,
“원래 저는 절강(浙江) 지방 사람인데 외동딸로 곱게 자랐습니다. 그런데 가세가 기울어져 아버님이 벼슬을 구하려고 서울에 올라왔기 때문에 부모를 따라왔습니다. 그런데 불행히 며칠 전에 부모님이 전염병으로 한 날에 갑자기 돌아가시니 저는 혈혈단신이 되었습니다.”
“역시 그런 사정이 있었구먼. 그런데 장례는 어떻게 지냈소.”
“예. 장례를 지내기에도 막막하던 차에 이 집주인이 주선하여 간신히 치렀지만 이제 고향으로 부모님의 시신(屍身)을 모셔야겠고, 그 동안의 진 빚도 갚으려면 제 몸을 팔지 않으면 아니 되겠기에 오늘 이처럼 나온 것입니다.”
하며 울음을 참지 못하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홍순언은 민망히 여겨,
“내 비록 큰 부자는 아니지만 여기 얼마 되지 않으나 이 돈으로 진 빚을 갚고 고향에 돌아가 좋은 사람을 만나 잘 살도록 하오.”
하고 주머니를 털어 선선히 2천금을 주고 그 자리를 일어섰다. 이에 처녀는 너무 감격하여 큰절을 세 번이나 하더니,
“하늘이 소녀를 버리시지 않으시는가 보옵니다. 대인의 은혜는 반드시 잊지 않겠습니다. 다만 대인의 성함이라도 알려 주십시오.”
이에 홍순언은 거절했으나 처녀는 끝내 홍순언의 이름을 알고서야 그 돈을 받았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선조 17년(1584)에 홍순언은 명나라 『대명회전(大明會典)?에 조선 왕실의 계보가 이성계의 부친 이자춘을 이인임으로 잘못 기록된 것을 고치기 위해 파견되는 종계변무(宗系辨誣) 사신 황정욱(黃廷彧)을 따라가게 되었다. 이에 명나라 서울 부근 조양산에 도착하니 전에 없이 구름 같은 장막을 치고 사신 일행을 맞이하는 것이었다. 더욱이 명나라 예부시랑 석성(石星)은 따로 홍순언을 모신 뒤 자기의 부인까지 소개하는 것이었다. 석성의 부인은 전에 홍순언이 구해 준 처녀였다.
영문을 모르는 홍순언에게 그 부인은 지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즉, 그녀는 고향에 돌아가 얼마 후 석성의 후처가 되었고, 홍순언의 은혜를 잊지 못해 비단옷감을 짜면서 ‘보은단(報恩緞)’이라는 꽃무늬의 글자를 수놓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홍순언이 사신을 따라 명나라에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
이리하여 석성의 노력으로 조선의 요구는 관철되고 귀국하게 되자 석성의 부인이 금은보화와 오색비단 100필을 선물을 주려고 하자 이를 사양하고 ‘보은단’이란 수를 놓은 비단만을 받아가지고 돌아왔다. 선조는 종계변무의 일을 해결한 것을 크게 기뻐하여 홍순언을 광릉군(廣陵君)으로 봉했다.
이 보은단에 얽힌 아름다운 사연이 사람들 사이에 전해져 홍순언이 살던 동네를 보은단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후에 보은단골은 와전이 되어 고운담골로, 다시 곤담골이 되었는데 한문으로 의역되어 미장동(美墻洞)이 되었다가 혹은 여장리(麗墻里)라고 했으며, 이를 줄여서 미동(美洞) 혹은 여리(麗里)라고도 하였다. 대한제국 말에는 보은단과는 관계없는 미동(美洞)이라는 엉뚱한 지명이 되었다.
또 다른 한 가지는 ‘보은단’과 ‘고은단’은 음이 비슷한 데에서 온 것이라고도 하며, 홍순언의 집이 부유해져서 홍순언이 자신의 집 담에다 ‘효제충신(孝悌忠信)’ 글자 등을 수놓아 단장해서 담이 매우 아름다웠으므로 고운담골이 되었다고도 전한다.(*)
오늘날의 을지로 입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