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과 정순왕후 송씨가 이별한 곳으로 전해오는 영미교
청계천에 놓였던 영미교(영도교)
단종과 정순왕후 송씨가 이별한 곳으로 전해오는 영미교
조선 초에 수양대군이 그의 조카 단종을 내쫓고 왕위에 오르기 위해 유혈극을 벌인 해가 계유년(단종 1년)이었으므로 흔히 ‘계유정난(癸酉靖難)’이라고 부른다.
이 당시 실권을 장악한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단종의 복위를 꾀하던 사육신 등이 오히려 체포되어 처형된 일은 오늘날까지도 파문을 남기고 있지만, 불운한 단종비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宋氏)의 애달픈 일화는 두고두고 세상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 왔다.
정순왕후 송씨는 14세의 어린 나이로 왕비에 책봉되었으나 그 이듬해 단종이 왕위를 내놓자 1년 만에 왕대비가 되었다. 그러나 2년 후 세조 4년(1458)에 단종이 영월로 귀양 가면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자 정순왕후도 송씨 부인으로 격하되었다.
16세의 단종과 17세의 송씨는 동대문 밖에서 눈물의 이별을 하게 되었다.
전해 오는 이야기로는 영월로 귀양 가던 단종과 정순왕후 송씨가 이별하던 곳은 청계천에 놓인 영미교(永尾橋)였다는 것이다. 이 영미교는 종로구 숭인동과 중구 황학동 사이 청계천에 놓였던 다리로 지금은 청계천 복개로 그 모습이 사라졌지만 전에는 뚝섬과 광나루로 통하는 중요한 다리였다. 원래 이 다리 이름은 단종과 송씨가 이곳에서 생이별을 했다 하여 영이별교(永離別橋)라고 일컬었던 것이 변하여 영미교가 되었다 전한다.
일명 영미다리, 영미교(穎眉橋)로 불린 이 다리는 성종 때 돌다리[石橋]로 다리를 만들어 영도교(永渡橋)라고 명명되었으며, 조선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을 하면서 석재를 빼어가 목교(木橋)로 바뀌었다. 일제 때 1933년에 콘크리트로 놓였다가 1967년 청계천 복개공사로 사라졌다.
단종과 눈물의 이별을 한 정순왕후는 영월 쪽을 바라볼 수 있는 현재 청룡사 부근(종로구 숭인동 17번지)에 작은 초가를 짓고 정업원(淨業院)이라 하였다. 그리고 머리를 깎은 뒤 희안(希安) ·지심(智心) · 계지(戒智)의 세 시녀를 데리고 정업원 암자에서 초근목피로 연명하며 지냈다. 조정에서는 근방에 집을 지어주고 이곳을 영빈정동(英嬪貞洞)이라 부르게 하였으나 정순왕후 송씨는 끝내 그 집에 들지 않고 정업원에 머물렀다.
정순왕후 송씨는 조석으로 동망봉(東望峰)에 올라 영월 쪽을 바라보며 단종의 평안을 빌었으나 헤어진 지 4개월 뒤인 세조 3년(1457) 10월 4일, 영월에서 노산군이 사약을 받고 숨을 거두자 이후부터는 동망봉에 올라 단종의 고혼(孤魂)이 헤매는 영월을 바라보며 명복을 빌었다. 이에 따라 숭인동 일대에는 정순왕후와 관련된 유적과 일화가 많이 남아있다.
조선말에 쓴 <<한경지략(漢京識略)>>에 보면 숭인동, 즉 동묘 남서쪽 마을은 싸전굴(米廛洞) 또는 장거리(場巨里)로 불려지고, 이곳에는 학교가 있었는데 전에는 여인들만 모이는 채소 시장이 섰다고 씌어 있다.
정순왕후 송씨가 시녀들과 정업원에 살면서 초근목피로 연명한다고 하자 근방의 부인들이 정업원 앞에 장을 서게 하여 누가 정순왕후 송씨에게 푸성귀를 제공했는지 알 수 없도록 송씨에게 채소라도 공급하려고 하였다.
정업원에서 빈궁한 살림으로 거처하던 정순왕후 송씨는 82세까지 장수하다가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사릉리 산 65번지의 사릉(思陵)에 안장되었다.(*)